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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위한 기도 _ 이해인



말을 위한 기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자리에 울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들을수 있음을

거듭 깨우치게 하소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위해

침묵과 고독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