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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박노해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 박노해-

생일날 새벽에 기도를 드린 후 긴 묵상의 시간을 가졌어요
눈을 감고 돌아보니 운동을 시작한 지 20년,
숨가쁘게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을 달려왔네요

인간 체력의 한계를 생체실험하는 듯한
끝도 없는 철야, 특근, 곱빼기, 지긋지긋한 물량 밀어내기
썰렁한 기숙사에서 자취방에서
일 마치고 탈진한 몸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침이면 맨날 세숫대야를 빨갛게 물들이던 어지러운 기억
수배자로 낮이면 칼처럼 긴장하다 밤이면 잠자리 걱정에 애가 타던 기억
지하 밀실의 고문과 사형, 무기징역, 무너지고 깨어짐, 침묵의 겨울삶………….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챙피하게
그래도 내 인생을 나는 참 사랑해요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좋은 세상을 바라며 좋은 일 하자고 애쓰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지금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만날 거구요
그 힘든 세월 동안 난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운동 그만둬버릴까,
잠시 뒤로 빠졌다 할까, 나 좀 챙기고 할까, 곁눈질해본 적이 없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 그리워서 시작한 운동이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전부인 운동이니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에요
그래요 좋은 님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요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마치 저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뜻이 크고 사랑이 큰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커진 듯이 느껴져요

역사의 큰 숲을 지나고 깊은 슬픔과 패배의 강을 건너다 보니
나도 따라서 깊어졌나 봐요

난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가까운 성당을 찾아
한나절 동안 홀로 묵상기도를 해왔어요
너무 피곤해서 기도중에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하고 최루탄 냄새가 배어
쫓겨나기도 하고 내내 울기만 하기도 하고 그랬지만
서울 올라와 고등학교 때부터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습관이지요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나를 돌아보면서 놀라곤 했어요
부쩍부쩍 정신이 커지고 깊어진 나를 보며 감사 기도를 바치곤 했지요
그게 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좋은 인연 때문이었지요
체포되기 일년 전부터 내 안이 고갈되어가는 걸 느꼈어요
몸도 영혼도 사람 관계도 처음 맞는 크나큰 위기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아 내가 죽어가는구나, 죽어가고 있구나,
더는 나를 쥐어짤 게 없구나 하면서도
맡은 책임 때문에 시대상황 때문에 그냥 밀고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날들이었지요
그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겠어요

너무 착해 너무 여린 좋은 벗들은 그 중압과 무미건조함과
무서운 긴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떠나가고 말았지요
그 최악의 시간 속에서도 그나마 죽지 않고 이렇게라도 나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던 건 그 때 만난 새로운 인연들 덕이었어요
마치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낡은 이념틀 속에서 기진맥진 악전고투하는 나를 보살피고
생기를 불어넣고 삶의 의욕을 불어넣으신 것이지요
그 좋은 님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무서워져요

저는 아무 가진 것 없지만 좋은 님들과 함께했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지요
그게 제 행복이에요
부처님이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셨지요

『나를 좋은 벗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병들어야 함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아난다가 이와 같이 말했지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헤아려보니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절반에 해당한다고 봐야겠지요』

부처님이 말했지요

『아난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

 맞아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 길의 절반」이 아니라
「이 길의 전부」인 거예요

좋은 님들이 있어 나는 힘을 얻고
좋은 님들이 있어 나는 날로 새로워지고
좋은 님들이 있어 내 키가 커지고 혼이 깊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내 앞날이 험하다 해도 좋은 님들과 함께라면
앞으로의 내 인생도 늘 감사와 은총의 시간일 거라고 나는 믿어요
그래서 미래가 얼마나 희망차고 가슴설레이는지 몰라요
내가 할 일은 따로 없어요
내가 좋은 친구, 좋은 동지가 되어드린 것밖에 다른 것은 없어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나를 알고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더 커지고 더 맑아지고 아름답고 착해지도록 하는 게 내 할 일의 전부이지요

지금까지 나를 키우고 나를 이끌어주신
사랑하는 나의 님들 한 분 한 분께 감사의 입맞춤을 보내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를 키우고 나를 움직이고 이끌어주실 벗들에게,
또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인연으로 다가오실 나의 님들께도
사랑의 입맞춤을 보내요
내가 살아 있음이 감사와 은총입니다